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사/세금 제도 (문단 편집) == [[왕망]]의 왕전과 오균육관 == 왕망이 [[신나라]]를 세워 등극하였을 당시의 [[서한]]은 왕조 말기적 현상을 노출하여 경제는 호족과 대상인 등에 집중되어 정체상태에 빠지고 일반 백성들은 빈곤과 고통 속에 있었으므로 사회의 불안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왕망은 그의 유교적 이상국가상을 바탕으로 정치, 사회, 경제 각 분야에서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왕망의 유교적 이상 국가란 곧 주나라였다. 왕망은 곧 주나라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다. 전국의 토지를 '''왕전(王田)'''으로 고쳐 조정 소유로 귀속시키고 사사로이 매매를 금지했다. 그리고 화폐 제도를 개혁하여 장안, 낙양, 한단, 임치, 완, 성도 등의 전국 6대 도시에 오균사시와 전부관을 설치하여 오균육관을 실시했다. 이 오균육관에서는 외상을 주는 것과 돈을 빌려주는 것을 시행하고 물가를 관리하게 했으며 술, 소금, 쇠붙이 등의 세금을 매기게 했다. 그러나 이건 오히려 물가가 폭등하고 이래저래 제도가 복잡하여 기존 제도보다 훨씬 못하고 오히려 사회 혼란을 야기했다. 토지국유화의 목적은 대토지 소유자들의 토지를 강제 몰수하여, 토지를 갖지 못한 유망 농민들에게 경작지를 갖도록 함으로써 토지겸병과 빈부불균형의 사회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재정확보를 꾀하려 하였지만 기존 호족세력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3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왕망의 정책 자체는 그의 신왕조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인심수렴의 면과 정권유지를 위한 재원확보라는 이원적 성격을 띤 '''현실적''' 정책이었다. 하지만 정책의 근거를 오직 '''고대의 경전'''에서 찾았고, 자신의 황제권을 높이고 견고히 하는데 필요한 재원확보에 더 집착함으로써 그의 정책은 일종의 강압정책이 되어 실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의 오랜 사회관습과 기존세력의 이해관계, 그리고 백성의 구체적 현실을 무시한 채 강행함으로써 결국 호족으로 대표되는 지방 유력 계층과 백성의 불만을 다같이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개혁을 하면서 기득권층에게 반발을 사는건 당연하지만 기득권층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등을 돌리게 했으니 안 망할 수가 없다. 결국 왕망의 개혁은 그 이름대로 왕창 망하면서 실패, 다 이전으로 돌아가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